불행을 극복하는 방법

2020. 7. 15. 19:171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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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리자는 오늘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한가?

 

볼프 슈나이더의 '진정한 행복'은 행복을 다각도로 분석한 책이다. 행복의 유용성에 대한 인정이 있고, 의문이 있고, 불신이 있고, 또 다른 견해도 있다.

 

종교를 가지면 행복할까?

 

 

<부그로, 천사와 마리아, 1900>

 

볼프 슈나이더는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종교의 최고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종교를 믿을까? 지금 살아있는 이 순간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하는데 왜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을까? 이에 대한 답으로 볼프 슈나이더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제시한다.

 

 

"안식은 내용 중심의 행위가 제한적으로만 가능한 내면의 샘이다."

그뢰네마이어

 

 

종교에 따라 표현방식이나 이미지가 다르지만 종교는 지옥을 공포의 상징으로 정해놓았다. 단테는 '신곡'을 통해 끓는 물, 악취로 가득한 나락, 오물 속에서의 쫓김 등으로 지옥을 묘사한다. 우리는 근래에 영화 '신과 함께'를 통해서 다양한 이미지의 지옥을 대리경험한 바 있다. 지옥의 이미지는 보편적으로 아름답지도 않고, 평안하지도 않다. 그곳에서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세에서 지은 죄를 혹독하게 치른다.

 

 

<영화 '신과 함께' 중에서>

 

종교라는 이름을 통해 수많은 전쟁이 치뤄졌고, 많은 사람들이 대량학살로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십자군 원정, 알비파 전쟁, 후스 전쟁, 30년 전쟁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만약 종교가 이러한 인간의 과오를 조장한다면 애초에 종교가 없었더라면 인간의 불행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종교를 통해 인간이 선을 지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엘 그레코, 지옥, 1610-1614>

 

철학자 안셀무스는 ‘신에 대한 생각만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천국에 대해 증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은 논리적이지 않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은 경험의 감각을 통해 당신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쉽게는 신에게 드리는 나의 기도를 통해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비과학적인 형상에서 신의 존재를 찾고, 그 자체가 신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을 믿음으로써 올바른 생활을 실천한다면 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종교 그 자체보다는 선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종교는 이상적 지향점을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에보트 핸더슨 데어, 천사, 1887>

 

종교 안에는 '신을 관조하는 것'과 같은 지고의 행복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세의 행복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천국의 이미지를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한다. 천국에 대한 상상은 비교대상이 없고, 검증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공허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를 통해 그만의 방식으로 천국을 대리경험하게 해준다. 인간은 절대자가 잠시 허락할 때만 세속과 천국이 교차하는 어떤 지점에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천국은 내가 살고 싶은 그 순간에 함께 하고 싶은 그 사람을 만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기독교적인 천국과는 괴리가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모습의 불의와 마주친다. 내가 노력해도 정당하게 얻어지지 않는 결과, 그로 인한 고통, 인정할 수 없는 정의롭지 못한 상황과 그에 파생되는 결과 등은 세속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 환멸 속에서 어떤 불가사의한 섭리가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신에 대한 인정 말이다.

 

 

<헨리 푸셀리, 악몽, 1781>

 

자연현상에 처음 의미를 부여한 것은 놀랍게도 미신이었다. 천둥은 악령들이 화가 나서 외치는 소리이며, 그릇이 깨지면 나쁜 일이 생길 징조이다. 반면 금성은 인간을 아름다움으로 이끄는 영험을 지닌 별이다. 우리는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하고, 어떤 이유로든 관련성 속에서 살기를 바란다.

 

이것이 종교가 가진 위안이다. 종교는 일상의 소소함을 크고 숭고한 의미로 확장시킨다. 존재하는 모든 것,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의 뜻이라 믿는 것이다.

 

 

<크람스코이, 사막의 그리스도, 1872>

 

"신앙인은 어디서건 신의 존재를 느끼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독일 시인 노발리스

 

 

종교가 가진 가장 큰 위로는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 때로는 버겁고 고달프다. 아무런 조건 없이 이런 나를 안아주고 위로해준다는 것은 달콤한 유혹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천국에 비해 형편없이 고달프다. 불안정한 경제상황, 직장, 인간관계, 코로나 등 많은 요인들이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한다. 탈출구가 없다. 종교는 정의롭고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함을 보여준다. 언제든 진심으로 용서만 구하면 안식을 얻을 수 있다. 불안정한 세상 속에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하나의 지지대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종교는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를 안심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니."

마태복음

 

 

종교는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고 원수를 축복하라는 요구를 통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지향한다. 공리주의처럼 말이다.

 

 

<토마 쿠튀르, 로마인의 타락, 1847>

 

우리는 얼마만큼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원수조차도 무조건 사랑하라는 요구는 실천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불행을 감소시키는 데는 기여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산업화에 따른 일자리 창출, 개인소득의 증가, 소득의 증가로 인한 생활수준의 향상은 종교적 철학과 관계없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또 다른 종류의 어떤 관념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의 행복은 서구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도 행해진다. 요가, 선, 초월적 명상 등이 그러하다.

 

"세상의 고통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인간이 원하는 그런 행복은 더이상 누릴 수 없다."

슈바이처

 

 

<렘브란트, 명상 중인 철학자, 1632>

 

때로는 종교는 매우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른 종교를 파괴하고 생명을 경시한다. 종교적 관점에서는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광신자들이 가장 행복한 인간이다. 프로이트는 종교를 통해 현실을 개조해서 지상의 행복을 늘리고 불행을 줄이겠다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말한 바 있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무신론자도 지고지순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때때로 우리를 좌절시킨다. 잔혹한 삶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 위안을 찾고 시련에 저항하면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다. 위안을 찾는 방법은 다양하다. 상상으로서의 위안, 보상이나 도피와 같은 실제적 행동으로서의 위안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위안은 현실에서는 찾기 어렵다.

 

누구나 좋아하면서도 내적인 반발을 일으키는 위안도 있다. '샤덴프로이데', 즉 타인의 불행을 은근히 즐기는 마음이다. 쇼펜하우어는 샤덴프로이데를 가리켜 인간 본성의 가장 추악한 부분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감정을 ‘에피카이레카코스’라고 부른다. 부러움과 선망이 방치되면 시기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변화한다. 이 사악한 감정을 통해 타인의 불행을 통해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소극적 의미로서의 샤덴프로이데는 인간이 야비하기 때문에 일부러 하는 행위는 아니다. 그저 우리는 함께 고통받고 있다는, 불행하다는 데서 작은 위안을 찾는다.

 

 

<바르톨로메오 만프레디, 아벨을 죽이는 카인, 1610>

 

세르반테스의 풍자소설 '돈키호테'는 이러한 인간의 기제를 증명하는 문학작품이다. 돈키호테는 이성을 잃은 사람이다. 즉 미친 사람이다. 그는 방랑하는 기사가 되어 공을 세우겠다는 황당한 목표를 정한다. 여인숙을 성이라 하고, 농가집 딸을 귀부인이라 칭한다. 수많은 일로 조롱을 당하지만 정작 본인은 정의를 위해 싸우는 기사라고 착각하고 있다. 대중은 돈키호테를 비웃고, 조롱하고, 동정한다. 그는 수차례의 여행을 통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다시 시골로 돌아와 조용히 눈을 감는다.

 

 

<한스 로텐해머, 미네르바와 뮤즈들, 미상>

 

신들에게도 추악한 본성이 있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신들의 샤덴프로이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오디세우스 자체가 이중적인 인물이다. 그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지혜롭기도 하고 교활하기도 하다. 10년 동안이나 지속된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자신을 전쟁터로 끌어들인 팔라메데스를 모함하여 죽게 한다. 이러한 양면성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 ‘오디세이아’에는 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신들은 때로 부도덕하며 이중성을 가중시킨다. 포세이돈은 사적인 복수를 위해 인간을 모두 없애려 하고, 아테네는 오디세우스의 개인적 복수를 지지한다. 올림포스 산에서 뮤즈가 인간들의 고통을 노래하면 신들은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니체신이 가장 아끼는 동물의 불행한 모습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인간을 괴롭힌다고 말하기도 했다.

 

 

<도메니코 티에폴로, 트로이로 들어가는 목마, 1773>

 

샤덴프로이데는 적극적인 행위는 아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행동으로 야기된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조금 즐거움을 느낄 뿐이다. 우리는 모두 그러하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모두가 사망했는데 내가 그 비행기를 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든다. 그것이 샤덴프로이데이다. 나 자신이 적극적으로 조장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통해 조금의 위안은 얻을 수 있다.

 

위안을 주는 상상이나 행동으로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운명에 저항하는 태도도 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몰락을 조장하는 신이나 인간에게 모욕적인 방법으로 저항할 수 있다. 운명에 저항한 대표적 인물은 오이디푸스이다.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의 왕자로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모친과 결혼하리라는 신탁에 의해 부모로부터 버려진다. 그는 코린토스의 왕에 의해 목숨을 구하고 성장한다. 그는 신탁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방랑하지만 결국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인 라이오스의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게 된다. 후에 저주의 신탁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자신의 눈알을 찔러 파내버린다. 그는 운명에 굴복할 것인지, 저항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고, 저항을 통해 자유의지를 입증했다. 비록 그는 눈을 잃었지만 보다 순수한 인간성을 지닌 인간으로 살아남았다.

 

 

<앵그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 1808-1825>
<앙리 레비, 오이디푸스와 딸 안티고네, 19세기경>
<베니녜 카녜로, 신께 자녀를 맡기는 눈 먼 오이디푸스, 1784>

 

“아아,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오오, 햇빛이여 내가 너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기를

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태어나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과 결혼하여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구나.“

소포클레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 중에서

 

 

인간의 삶에는 빛과 어둠처럼 행복과 불행이 교차한다. 이 섭리를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불행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때로는 종교를 통해 위안을 받기도 하고, 도피하기도 하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상을 통해 불행을 경감시키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도 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이다. 어떠한 의미에서 불행은 성숙을 위한 기회일 수도 있다. 불행은 극복할 수 있고 어둠이 지나면 다시 빛이 찾아온다. 그것이 삶의 진리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불행을 극복할 수 있다.

 

모네리자의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네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