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불친절한 이유

2020. 11. 1. 16:32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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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리자는 우리들이 흔히 하는 실수, 나 자신에게 불친절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주제는 상처받은 어린아이를 내면에 품고 있는 성인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뒤러, 산토끼, 1502>

 

 

우리는 사회적인 사람이 되라고 교육받는다. 그래서 타인에게는 친절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불친절한 경우가 많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인생사를 들여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상처라는 이름의 기억이 있다.

 

 

 

<피에로 디 코시모, 숲속의 불, 15세기경>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면 강렬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상처라고 부른다. 상처의 또 다른 이름은 학대이다. 학대는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정서적 폭력도 포함된다. 소극적으로는 방임, 보다 적극적으로는 보호자의 권리로 행해지는 악행들이 있다.

 

상처받은 경험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심리학자들이 어린 시절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 시절에 경험했던 것들이 평생동안 한 사람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를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어린아이들은 그 원인을 자신에게 돌린다. 자신이 너무 사랑스럽지 못해서, 너무 부족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그 상처는 너무 커서 그 사람의 삶을 압도한다.

 

 

상처와 화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후앙 산체스 코탄, 수렵조가 있는 정물, 1600-1603>

 

 

내 안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들여다봐야만 하는 이유는 상처와 화해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괴로운 삶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떠올리기 싫은 상처는 족쇄가 된다. 상처에 대한 기억을 억누르는 이유는 힘이 없는 어린아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픔을 꾹꾹 눌러 모든 감각을 죽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상처받은 사람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아픔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상처에 저항한다.

 

 

"어렸을 때 체험하고 견디어 낸 아픔이 너무 컸다. 내 인생에 필요한 만큼의 아픔은 이미 다 받았다. 나는 더이상의 아픔을 원하지 않는다."

한스 뵈링어

 

 

가시는 거리를 만든다.

 

 

 

<워터하우스, 장미의 영혼, 1908>

 

 

무의식에 상처를 품고 있는 사람은 가시가 있는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와 같다. 이런 아이는 누구에게도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아이는 사람과의 관계를 신뢰할 수 없으며 혼자서 자신을 잘 지키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 그런 방법으로 문제를 잘 해결할 수는 없다.

 

나는 누구인 나다.

 

인간은 자기 자아의 존재 안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가장 깊은 내면이 병든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어른아이가 되는 이유는 이러한 상처에 기인한다. 그들은 '나는 누구인 나다'라는 느낌을 잃어버렸다.

 

 

 

<안드레아 델 사르도, 자애의 의인상, 1518-1519>

 

 

아이는 자기 자신 때문에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기다움을 느끼는 데 상처를 받는다. 한 인격체로서 사랑을 받고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는 체험을 거절당한 아이는 마음의 타격을 받는다. 상처받은 경험은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아이는 사랑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더이상의 상처를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받지 않기 위해 하는 일들은 오히려 이 아이를 고립시키고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 결과 자신이 갈망하는 모든 사랑을 차단한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가정에 사는 부모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처지에 있지 못하다. 부모 자신이 스스로 결핍을 느끼기 때문이다."

브래드 쇼

 

 

 

<에곤 쉴레, 겨울 버찌와 자화상, 1912>

 

 

자기 안에 있는 아이가 상처받은 사람은 내적, 외적으로 반응할 때 폭력을 쓴다. 외면하고 놔둔 상처는 우리를 강요하여 그 상처를 계속 옮기면서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다.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낸다.

 

스스로 상처받는 일 중 하나의 형태는 자신에 대한 처벌이다. 어린 시절 받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처벌한다. 과거의 경험에서 공격성을 끌어내어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 타인을 다치게 하지 않는 방법이니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처벌이 위험한 이유는 신체화증상 또는 우울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원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아프거나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자신을 해치기도 한다. 상처받은 아이는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야 하는 시기에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윌리엄 블레이크, 위대한 붉은 용과 바다의 짐승, 1805>

 

 

"나쁜 자기비난은 정말로 나쁜 일이나 나쁜 짓에 상응하지 않고 또 당사자의 인격에 해당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 나쁜 비난은 그 사람이 사랑하는 다른 사람과 관련되어 있고, 그 사람을 비난하게 되는 원래의 이유는 좌절된 사랑에서 기인한다."

프로이트

 

 

가치 없는 사람은 없다.

 

자신에 대한 처벌은 스스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자신을 파멸시키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는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많은 사고는 자신에 대한 처벌의 표현이다. 의도적으로 사고를 내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자기처벌과 같은 동기가 사고를 유발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고가 나서 다른 사람이 휘말리게 되면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잘 대해주지 않는다. 또한 사고에는 다른 사람을 향한 무의식적 공격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자기처벌에는 자해와 같은 직접적인 행동도 포함된다. 이 상처받은 아이는 자신이 그만큼 가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두려움은 사랑을 방해한다.

 

 

 

<피카소, 수프, 1902-1903>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아이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이는 거부당하는 것, 혼자 있게 되는 것, 과실, 삶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이런 아이는 자신을 엄격하게 대함으로써 두려움을 몰아내고자 한다. 자신에게 냉혹한 것은 충분히 보호받지 못함으로써 생긴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아이는 자기 자신과 인간을 신뢰하지 못한다. 양육자와 확실하고 분명한 관계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을 불신한다. 이 아이에게 모든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다. 이 아이는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완벽한 규범 안에서 살아가고자 한다. 규범은 때때로 내면에서 공격성과 감정이 치밀어 올라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내면에 폭발물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그 폭발을 막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베이컨,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 1953>

 

 

"불충분한 것, 나쁜 것, 약점이 많은 것, 악한 것도 어느 정도 존재하며 앞으로 생기게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푸러

 

 

쉘렌바움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을 '자기파괴'라고 부른다. 비인간적 형벌을 받으면서 자기 삶을 마감하는 그리스의 영웅들은 인간이 자신을 파괴하는 상징이다. 그리스의 영웅인 시지푸스는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자기를 파괴하는 상징이다. 그들이 받은 형벌은 잘못된 잣대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몰락시킬 수 있는지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받는 형벌 속에서 엄격주의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지나친 엄격함은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시시포스, 1488-90>

 

 

"자신의 삶을 쥐고 흔들며 감시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더 극단적으로 모든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푹 쓰러진다."

쉘렌바움

 

 

삶을 위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야콥 자이제네거, 만토바의 엘레오노라의 초상, 1534>

 

 

우리는 시지푸스의 신화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통제하려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삶 전체가 통제권 밖으로 빠져나가 버린다. 붕괴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삶을 방해한다. 모든 느낌과 행동을 통제해야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래서 정작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한 에너지가 없다.

 

 

"자신의 가련한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임을, 그러니까 불가능한 일임을 시인해야만 한다."

 

 

나의 상처는 나의 동반자이다.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이젤 앞에 있는 자화상, 1556>

 

 

내가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은 밖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내 안에서, 내 진정한 가치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나는 어떤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내면에 있는 깊은 동굴을 들여다보고 고통을 인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것은 분명 쉬운 일도 아니고 부드러운 일도 아니다. 오히려 거칠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꼭 필요한 일이다. 내면의 상처를 잊고자 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상처를 인정하고 잘 다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어두운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에 대해 자비로워야만,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긍정하고 받아들여야만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을 자비롭게 대하고 자신의 어둠과 화해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비로울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일반적인 사람의 삶을, 진정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

 

모네리자의 '나 자신에게 불친절한 이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네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

 

안셀름 그륀, 자기 자신 잘 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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