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함정

2020. 11. 5. 23:05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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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리자는 인간의 보편적 문제, 질투의 함정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질투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라파엘로, 방울새의 성모, 16세기경>

 

 

질투는 한 살짜리 어린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뚜렷하게 드러난다. 형제들 중 한 아이만 귀여워하면 다른 아이는 금세 알아차리고 화가 난다. 강아지들도 마찬가지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한정된 부모의 사랑을 차지하려는 형제들은 경쟁자 구도를 갖는다고 말했다. 사랑에도 공정한 분배가 필요하다.

 

질투는 민주주의의 기초이다.

 

 

 

<요하너스 모레일서, 울고 있는 헤라클레이토스, 17세기경>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민주주의 운동은 질투라는 감정에 의해 고무되었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들 사이에 제1인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에페소스의 시민들을 모두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민주주의에 있어서도 변혁을 정당화하는 이론은 인간의 격정을 위장한다. 민주주의 이론에 추진력을 제공해온 격정이란 질투라는 감정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을 주고받기 좋아하는 것은 일반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구체적 행동이다. 오늘날은 SNS를 통해 유명인, 평범한 사람을 막론하고 범죄에 가까운 막말로 댓글이 도배된다. 어떤 사람은 그 댓글로 인해 삶을 마감한다.  

 

 

 

<고흐, 롤랑 부인의 초상, 1899>

 

 

"오, 자유여. 그대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는가!"

마담 롤랑(장 마리 롤랑의 아내)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질투의 대상이 되고 어떤 방식으로든 이러한 죄를 처벌하는 것은 덕행으로 간주된다. 이런 특별한 형태의 덕행은 사악한 즐거움을 안겨주고 그 자체로 보상이 된다. 정치가들은 다른 정당에 속한 다른 정치가를 칭찬하는 일이 거의 없다. 오히려 모독한다. 그들은 탄식하면서 악어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빈센초 카무치니, 카이사르의 암살, 19세기경>

 

 

질투는 불행의 원인이다.

 

질투는 인간의 본성 중 가장 불행한 것이다. 질투가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불행을 안기고 싶어 하고, 처벌을 받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을 때는 반드시 행동으로 옮긴다. 질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대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질투하는 자신 역시 불행하게 된다. 질투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가진 장점, 즉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그들의 장점을 빼앗는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저서를 통해 비교는 불안에서 비롯되고 때로는 이 불안이 자기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건설적인 방향으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고매한 인격이 필요하다.

 

 

 

<세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1892-1893>

 

 

질투는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성자들에게는 '무욕(無慾)이라는 치료법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자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질투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행복이다. 그러나 질투 그 자체가 행복을 가로막는다는 모순이 질투의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다.

 

질투는 어린 시절의 불행에 영향을 받는다.

 

질투는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 자신의 형제들이 더 사랑받는 것을 목격한 어린 아이에게는 질투하는 버릇이 몸에 배게 된다. 그 경험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된다. 이 어린 아이는 어른이 되었을 때 사회의 불공평함에 눈을 뜨게 되면 분노한다. 이 아이의 분노를 마주 대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도 귀찮은 존재가 된다. 이 아이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결국 불행해진다.

 

 

 

<짐베르크, 부상당한 천사, 1903>

 

 

부모의 부족한 사랑은 질투하는 아이를 만든다.

 

비교할 수 있는 형제가 없더라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부모에게서 자라난 아이는 질투하는 아이가 되어버린다. 세상에는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많기 때문이다. 다른 가정의 아이들보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아이는 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미워하게 되고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이 이스마엘*과 같은 존재라고 느낀다. 정당하게 사랑받을 권리를 빼앗긴 사람은 자연스럽게 마음이 비뚤어지게 된다.

 

 

 

<베르하겐, 아브라함에게 쫓겨나는 하갈과 이스마엘, 1781>

 

 

행복은 정말로 도움이 될까?

 

영국의 슬라우 지방에서 이루어진 행복에 대한 연구의 결론 중 하나는 '비교하지 말 것'이었다. 비교는 현재의 나를 충분히 즐기지 못하게 만든다. 나에게 주어진 현재를 감사하며 충분히 즐기는 태도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다. 햇살이 좋은 가을날 오후를 즐기며 나폴리의 아름다운 가을햇살을 상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직접 가보면 별다를 것도 없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을 통해 아름답기로 유명한 관광지를 직접 돌아다니는 것보다 방 안에 앉아 그곳의 사진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항상 더 나은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행복을 누릴 수 없다. 현명한 사람은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 때문에 자신의 즐거움을 망치지 않는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낮잠, 1877>

 

 

질투는 일종의 나쁜 버릇이다.

 

질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사물 사이의 관계를 통해 보려는 데서 생겨난다. 한 연구에서 친구가 연봉 3억을 받고 내가 2억을 받는 경우와 친구가 연봉 8천만 원을 받고 내가 1억을 받는 경우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선택은 후자였다. 내가 적게 받더라도 친구가 나보다 덜 받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은 존재이다.

 

나의 성공만으로 질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안토니오 플라이우올로, 헤라클레스와 히드라, 15세기말>

 

 

명예욕을 가진 사람은 나폴레옹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아마도 나폴레옹은 카이사르를 부러워했을 것이고,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를 부러워했을 것이고, 알렉산드로스는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이러한 비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없다. 세상에는 언제나 나보다 더 성공한 사람이 있다. 비교하는 습관을 버리면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필요한 겸손은 질투와 관계가 있다.

 

 

<조지 클로젠, 울고 있는 젊은이, 1916>

 

 

우리는 겸손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겸손하고 존경받을만한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극단적인 형태의 겸손이 미덕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나친 겸손은 자신감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자존감이 떨어지고 질투로 인해 불행을 느끼고 악의를 품기 쉽다.

 

질투는 경쟁과 관련이 있다.

 

 

 

<뭉크, 불안, 1894>

 

 

평등주의와 사회적 지위의 불안정성은 질투의 영역을 넓혀놓았다. 현대는 질투가 만연한 시대이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질투하고, 가난한 나라는 부유한 나라를 질투한다. 질투는 계급과 민족 간의 정의를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질투의 결과로 만들어진 정의는 최악의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정의는 불행한 사람들의 즐거움을 증가시키기보다는 행복한 사람들의 즐거움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피로는 질투의 원인이 된다.

 

자신이 맡고 있는 일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이러한 불만은 힘이 덜 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질투하는 방식으로 표출되기도한다. 그러므로 질투를 줄이는 방법 중의 하나는 피로를 줄이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이것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에 공정한 사회 시스템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즉 사회의 관심, 우리 모두의 관심이 필요하다. 더불어 사는 사회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튼다.

 

 

 

<마그리트, 사이렌의 노래, 1953>

 

 

본능적인 행복은 보기 드물다.

 

현대의 문명은 인간의 심리가 우애보다는 증오 쪽으로 더 쉽게 기울어지게 한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 수집한다. 현대에는 비교대상이 너무 많다. 현대인의 심리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다른 사람이 누리고 있는 것을 나만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은 증오로 더 쉽게 기울어지게 한다. 현대인이 누리는 즐거움의 총량은 원시사회에 비해서는 훨씬 더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행복해진 것은 아니다. 복잡한 사회 속에서는 정신수양이 좋은 해결방법이 된다. 나의 중심을 잡는 일이중요하다.

 

질투는 밤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영웅적 고통의 표현이다.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길, 17세기경>

 

 

질투는 나쁜 것이며 그 결과는 때로 무섭다. 질투로 인해 죽음과 멸망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길은 어떤 경우에는 더 나은 삶으로 이르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질투로 인한 절망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서는 지성을 확대해온 것처럼 감정도 확대해야 한다. 나의 중심을 잡고 나를 뛰어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비교가 아닌 나 자신을 중심에 둠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모네리자의 인간의 보편적 문제, 질투의 함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네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스마엘 :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하갈은 아브라함의 부인인 사라의 시녀였고 하갈과 이스마엘은 쫓겨나 광야에서 방황하게 됨.

 

 

<참고>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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