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화가, 반 고흐

2020. 6. 12. 11:26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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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리자는 태양의 화가, 반 고흐를 소개하고자 한다.

 

<고흐, 귀를 자른 자화상, 1899>

 

고흐는 짧은 삶을 살았다. 그마저도 너무 고통스러운 삶이었다.

고흐는 평생 가난에 시달렸으며, 열등감에 괴로워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작품은 그 고통 속에 피어난 한 망울의  꽃이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이 꽃나무처럼 꽃망울을 피우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때가 오기까지 그는 길고 추운 겨울을 지나야 한다. 나중에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긴 겨울을."

고흐

 

 

고흐는 자신의 말처럼 아주 길고, 추운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비로소 죽음 이후에야 그에게는 봄이 왔다.

 

고흐는 살아있는 동안 17년 간 동생 테오와 긴 편지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두 형제의 편지 덕분에 그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고흐는 이따금씩 박물관에 갔다. 렘브란트, 홀바인, 벨리니 등의 작품을 통해 그림을 보는 것이 그에게는 기쁨을 주었다. 그즈음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은 화가에 대한 것이었다. 동생 테오는 직업을 갖는 데 필요한 기술을 배워보라고 설득했지만 그는 관심이 없었다.

 

물감을 살 수 있는 돈조차 없었지만 그에게는 그림에 대한 열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자신에게 구원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인간성을 담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철학을 가슴 속에 새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유독 평범한 우리네 일상들이 소소히 담겨져 있다.

 

 

<고흐, 울고 있는 노인, 1890>

 

고흐는 헤이그에서 화가로서의 첫 시작을 한다. 그는 정물화를 그리거나 대부분의 화가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소외된 노동자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현실적으로 모델을 구할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기도 했고, 인간성에 관심을 갖는 그의 철학도 영향을 미쳤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삶에서 그림이 가장 중요함을 깨달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 그는 종종 새벽녘에 그림을 그리러 나갔는데, 모든 사물이 고유한 색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중요한 윤곽을 파악하기 좋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때때로, 아니 자주,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러한 절망적인 마음이 몸의 병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1882년 헤이그의 시립병원에 입원하게 된 그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의사가 환자를 다루는 방식을 보고, 그림을 그릴 때 모델에게 어떤 방식으로 적절한 자세를 잡게 만드는지 배웠다. 그는 더 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림은 영원한 일상이다."

 고흐

 

고흐는 그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고민했다. 그림만이 그를 기쁘게 했고, 다른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먼 미래의 언젠가는 자신의 작품이 유명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기도 했지만, 그 자체가 기쁨을 주지는 못했다. 그는 늘 더 잘 그리려고 했고, 강박감에 시달렸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에게 기쁨이기도 했지만 고통, 절망, 슬픔이기도 했다.

 

<고흐, 토탄을 채취하는 여인들, 1883>

 

고흐의 초기 작품들을 보면 어두운 그의 내면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일상을 담고자 했던 그의 그림은 삶의 비정함, 비루한 현실, 막막한 미래 등에 대한 번뇌가 투사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했고, 종종 좌절감에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살아 생전 그가 판매한 그림이 단 한 점뿐이라는 것은 그가 살아있는 세상의 현실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면서 그의 그림은 비로소 색채의 옷을 입게 되었다. 붉은 양귀비, 하얀 장미, 노란 국화 등이 눈에 들어오면서 화려한 색을 입은 꽃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럽의 봄은 일조량이 많아 자연 그 자체가 모델이고, 작품이었다.

 

 

<고흐, 꽃이 핀 과수원, 1888>

 

프로방스로 간 고흐는 그곳의 아름다움과 밝음에 빠져들었다. 프로방스의 강렬함은 그의 예술적 열정을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 그는 다양한 풍경화들을 그리면서 하늘색, 황색, 분홍색, 붉은색, 진노란색, 진초록색, 보라색 등 광적일 정도로 화려한 색채의 그림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에 가득 차 있었고, 자신에 대한 회의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늘 외로움과 고독함에 시달렸던 고흐는 화가들만의 공동체를 꿈꾸게 된다. 그는 고갱과 그의 작품에 호감을 느꼈고, 고갱과 함께 작업하면 더 나은 무엇인가를 창초해 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고갱과의 생활은 기대했던 것만큼 잘 되지 않았다. 세상을 보는 관점, 그것을 작품에 투사하는 방식, 삶에 대한 태도 등에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불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노란집이라 불리던 그들의 공동체는 더이상 계속 되기 힘들어 보였다. 고갱은 불편한 생활을 이어가기 싫었고, 고흐는 떠나가려는 고갱을 붙잡고 싶어했다. 그러나 고갱은 결국 고흐를 떠났고, 고흐는 또다시 절망에 빠져든다. 고갱은 광적으로 작품활동에 집착하는 고흐를 그렸고, 고흐는 고갱이 떠난 후 '고갱의 의자'라는 작품을 그린다.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빈센트, 1888>
<고흐, 고갱의 의자, 1888>

 

1888년 12월 25일, 심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던 고흐는 시립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는 고갱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고, 그 사실은 그에게 죽을만큼 심한 고통을 주었다. 그는 때때로 안정되기도 했지만 많은 시간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사실 때문에 고흐와 고갱이 연인관계가 아니었는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흐는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광기에 가까운 열정에 종종 사로잡혔고, 자신도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제어하기는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 광기를 오로지 그림에만 쏟아부었다. 그에게는 그림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고흐, 붓꽃, 1889>

 

고흐는 회복되고, 다시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어떤 때는 며칠 동안이나 발작상태가 계속되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안정되고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병세가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그의 슬픔은 더욱 커져만 갔고, 그의 삶은 흔들렸다.

 

1890년 7월 29일, 고흐는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그를 옭아매던 세상을 놓아버렸다. 그는 너무 춥고 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그가 동경하던 별이 되었다.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

간다는 뜻이다."

고흐

 

오늘도 1깡한 무식한 모네리자의 반 고흐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네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vw9d3YlysS0

<고흐의 작품세계>

www.youtube.com/watch?v=Pvf69HkBwTA

<고갱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