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을 부르는 사랑

2020. 9. 27. 15:37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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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리자는 독특한 사랑의 방식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여성 프리다 칼로를 소개하고자 한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영화 '프리다'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프리다 칼로, 디에고와 나, 1949>

 

 

 

우리는 늘 운명적인 사랑을 꿈꾼다. 나의 반쪽을 그리는 마음은 인간의 불완전성에 기인하며 실존의 허무함을 메우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사랑은 희망으로 시작하지만 때때로 절망으로 끝나버리기도 한다.

 

 

 

 

<프리다 칼로, 태양과 생명, 1947>

 

 

 

 

프리다 칼로는 위대한 예술가이기 이전에 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바쳐 평생동안 사랑한다. 디에고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강했다. 그리고 그 열정의 크기만큼 커다란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프리다 칼로,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1931>

 

 

 

"코끼리와 비둘이의 만남"

 

세기의 커플의 결혼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프리다의 작품 속에서는 지나치게 크게 묘사된 디에고와 어린 아이와 같은 프리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어린 아이처럼 디에고를 숭배하고 의존했다. 작품 속의 디에고는 프리다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준다.

 

 

 

 

<프리다 칼로, 꿈, 1940>

 

 

 

현실에서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디에고는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쁜 남자에 가까웠다. 그는 여성편력이 심했고 때때로 폭력적이었다. 나쁜 남자 디에고는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도 관계를 가졌다. 프리다가 디에고에게 한눈에 반하게 된 계기는 그의 폭력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프리다는 재능 있는 예술가답게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취향이 반영된 선택의 결과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상처로 돌아왔다.

 

 

 

 

<프리다 칼로, 죽음을 생각하기, 1943>

 

 

 

<프리다 칼로, 우주와 지구 그리고 멕시코에서 나와 디에고, 솔로들이 벌이는 사랑의 포옹, 1949>

 

 

 

디에고는 프리다보다 스무 살이나 연상이었고 진보적이고 박식했다. 게다가 이미 부와 명예도 지니고 있었다. 프리다에게 있어 디에고는 높은 산과 같았다. 프리다는 그의 눈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보았다. 그녀의 작품 속에는 그러한 상징들이 많이 표현된다.

 

 

 

 

<프리다 칼로, 내 마음 속의 디에고, 1943>

 

 

 

<프리다 칼로, 희망의 나무 굳세거라, 1946>

 

 

 

프리다는 똑똑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열다섯 살 때 멕시코 최고의 명문 국립 예비학교에 들어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문학, 철학, 과학, 예술 등에 대해 깊이 있는 교육을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프리다의 아버지는 철학과 고고학에 심취한 독서광이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통해 무한한 지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숭배했고 그녀의 아버지도 똑똑한 프리다를 사랑하고 인정했다. 프리다는 디에고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프리다 칼로, 숲 속의 두 누드, 1939>

 

 

 

왜 눈먼 사랑은 고통이 되었을까?

 

 

 

<프리다 칼로, 간호사와 나, 1937>

 

 

 

 

디에고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튀는 행동을 즐겨 했고 모든 일에서 중심이 되고자 했다.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부족해서 때때로 잔인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디에고는 사고뭉치였고 프리다는 그런 디에고를 돌보았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랑의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프리다 칼로, 상처입은 사슴, 1946>

 

 

 

 

프리다는 종종 히스테리컬한 여성으로 기억된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너무 섬세하고 예민하고 소심했다. 그녀는 종종 사소한 일에 상처받았고 그러한 감정이 폭력적으로 발현되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친구를 사귀는 것도 힘든 일이어서 상상 속의 친구를 만들어 대화를 나누곤 했다. 창문 위에 다른 창문을 그리면 상상 속의 친구가 나타나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문을 지우면 현실로 돌아왔다. 상상 속의 친구는 그녀의 분열된 자아로 보여진다.

 

 

 

 

<프리다 칼로, 기억, 1937>

 

 

 

<프리다 칼로, 두 명의 프리다, 1939>

 

 

 

그녀의 작품은 왜 그토록 강렬할까?

 

 

 

 

<프리다 칼로, 머리를 자른 자화상, 1940>

 

 

 

<프리다 칼로, 디에고와 나, 1944>

 

 

 

프리다의 작품은 어둡고 울고 있는 자화상이 많다. 그녀는 현실에서도 우울했다. 버스 전복 사고로 척추가 온전하지 않았던 그녀는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고 아이를 가지기도 힘들었다. 디에고의 아이를 간절히 바랬던 그녀는 그토록 바라던 임신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었고 세 번이나 중절수술을 받았다. 그녀는 그 고통을 자신을 공격함으로써 해소했다.

 

 

 

 

<프리다 칼로, 떠있는 침대, 1932>

 

 

 

<프리다 칼로, 칼로 몇 번 가볍게 찌르기, 1935>

 

 

 

<프리다 칼로, 상처입은 탁자, 1940>

 

 

 

프리다와 그녀의 작품 속에서 디에고를 향한 공격성은 보여지지 않는다. 끝없는 고통과 상처만을 안겨주는 사랑이었지만 그녀는 디에고에게 복수하는 대신 자신을 파괴했다. 그리고 파괴된 자신의 깊은 곳에 디에고를 가두어버린다.

 

 

 

 

<프리다 칼로, 죽음의 마스크를 쓴 소녀, 1938>

 

 

 

<프리다 칼로, 부러진 기둥, 1944>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고는 '버스 전복 사고'와 '디에고와의 만남'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육체와 마음은 망가졌다. 모순되게도 이 사고들은 예술가로서의 그녀에게 평생 영감의 근원이 된다.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든 아픈 사람이었고 예술은 그 아픔을 표출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녀의 작품이 강렬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작품 속에 고통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통을 승화시키는 대신 반복해서 경험함으로써 고통과 하나가 되어버린다.

 

 

 

 

<프리다 칼로, 가시 목걸이를 한 자화상, 1940>

 

 

 

<프리다 칼로, 생명의 꽃, 1944>

 

 

 

그녀는 평생 동안 서른 번이 넘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상처로 가득한 위대한 작품들을 남겼다.

 

 

 

 

<프리다 칼로, 뿌리, 1943>

 

 

 

<프리다 칼로, 희망 없이, 1945>

 

 

 

모네리자의 파멸을 부르는 사랑, 프리다 칼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네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보기>

 

www.youtube.com/watch?v=B9XYtPqWLB4

 

<참고>

 

서지형, 속마음을 들킨 위대한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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