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는 절규

2020. 9. 6. 18:46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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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리자는 소리없는 절규를 통해 자신의 외침을 세상에 전달하고자 했던 뭉크라는 위대한 예술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뭉크를 알고 있는가?

 

 

 

<에드바르 뭉크>

 

 

"해질 무렵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붉게 변했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극도의 피로를 느낀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기대섰다. 검붉은 피오르드 해안 위로 불의 혀가 뻗어 나왔다. 두려움에 떨며 뒤쳐진 나를 남겨두고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다. 그때 나는 거대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연의 절규를 들었다." 

뭉크

 

 

<뭉크, 절규, 1883>

 

<뭉크, 절규(석판화)>

 

뭉크는 실존의 고통을 형상화한 예술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뭉크라는 이름은 몰라도 그의 작품 '절규'는 누구나 한 번쯤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절규'는 작품 자체도 유명하고, 작품 패러디도 많고, 광고와 개그 패러디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절규' 패러디 (만화영화 '심슨네 가족')>

 

<'절규' 패러디 (영화 '스크림')>

 

'절규'는 뭉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가장 고가이고, 도난당했다가 다시 되찾은 작품이기도 하다. 도난범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절규'가 너무 많이 알려진 작품이라 장물로 처리하기가 힘들어서 다시 되돌려주었다. 뭉크는 살아있던 시기에도, 죽음 이후에도 이러저러한 고난을 겪었다.

 

 

<뭉크, 절망, 1893>

 

 

 

<뭉크, 불안, 1894>

 

 

뭉크는 노르웨이의 뢰텐에서 가난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의사나 기술자가 되기를 바랬지만 그는 오슬로 공과대학에서 미술 공예학과로 전과하면서 결국 그림을 그리게 된다. 표현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그의 작품은 대부분 30대에 완성한 것이다.

 

 

<뭉크, 에로스와 프시케, 1907>

 

뭉크의 그림은 바로크 시대나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객관적인 아름다움이 없다. 그의 그림은 오히려 기괴해 보인다. 그는 그림을 통해 아름다운 피조물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어둡고 추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성이 오히려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의 그림을 보면 가슴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도 뭉크의 작품에는 그의 사적인 개인사가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는 삶에서 느끼는 불안, 두려움, 고통, 공포, 허무 등을 그림을 통해 표현했다.

 

 

<뭉크, 우울, 1891>

 

“나는 숨쉬고, 느끼고, 괴로워하는 사람, 즉 살아있는 사람을 그릴 것이다.”

뭉크

 

표현주의 예술가들은 인간의 고통, 가난, 폭력 등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들은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그림보다는 형태의 왜곡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이상화시켰다. 그들의 작업을 통해 불안한 인간의 정서는 연민의 옷을 입게 된다.

 

 

 

<뭉크, 사춘기, 1895>

 

 

“나는 죽음의 기억을 그린다. 병과 광기와 죽음이 내 요람 위를 떠돌았고 내 온 생애에 걸쳐 내게 따라붙은 검은 천사가 되었다.”

뭉크

 

<뭉크, 죽은 어머니, 1900>

 

<뭉크, 병실에서의 죽음, 1893>

 

 

그는 평생 죽음의 공포와 함께 살았다. 그의 주변에는 늘 아픈 사람이 있었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뭉크의 어머니는 뭉크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죽었다. 뒤이어 그의 누나도 결핵으로 죽었다. 두 사람의 죽음 이후 광기에 가까울 정도 신앙에 집착했던 그의 아버지도 뭉크가 스물 여섯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 몇 년 뒤에는 남동생도 죽었고, 여동생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작품 속에서 유독 죽음을 많이 표현했다. 그의 작품에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그의 마음이 투사되어 있다.

 

"불안과 병이 없었다면 나는 키가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다."

뭉크 

 

 

<뭉크, 마돈나, 1895-1896>

 

<뭉크, 키스, 1897>

 

<뭉크, 키스, 1892>

 

뭉크는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 기쁨과 희망보다는 고통과 절망을 느꼈다. 그에게 있어 여성은 남성에게 잔인한 상처를 주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몇 차례의 사랑을 통해 그는 여성을 불신하게 되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밀리라는 여성은 그에게 첫키스를 선물했지만 그는 그 키스가 자신에게서 생의 향기를 빼앗아갔다고 기억한다. 그녀는 뭉크의 절친한 친구와 결혼한다. 툴라 라르센이라는 여성과의 관계는 여성에 대한 뭉크의 불신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준다. 그녀는 뭉크에게 강하게 집착했다. 뭉크와 말다툼을 하다가 권총으로 그의 손을 쏘아버린다. 이 사건으로 뭉크의 왼쪽 손가락의 일부가 날아갔다. 그래서인지 이후 그는 사랑에 뛰어들기보다는 관조하는 것으로써 자신을 보호한다.

 

 

<뭉크, 흡혈귀, 1895>

 

<뭉크, 재, 1925>

 

<뭉크, 이별, 1896>

 

 

 

“나는 인류의 가장 두려운 것을 두 가지 물려받았는데 그것은 병약함과 정신병이다.”

뭉크

 

뭉크는 어린 시절에 허약한 아이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신경성 강박증과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그런 그에게 술의 유혹이 따라다니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술고래였다. 그의 삶에는 죽음과 광기에 대한 불안이 늘 따라다녔기 때문에 그의 정신은 온전하지 않았다. 마흔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그는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뭉크, 밤의 방랑자, 1923-1924>

 

<뭉크, 스페인 독감 후의 자화상, 1919>

 

 

다행스럽게도 뭉크는 심신의 건강을 되찾아 퇴원한다. 그리고 여든 한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마음의 고통이 치유되면서 천재적인 창작능력도 함께 사라졌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작품활동을 계속했지만 퇴원 이후 괜찮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영혼을 태워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그들의 고뇌와 절망, 불안은 창작을 위한 훌륭한 재료가 된다. 모순되게도 불안정한 정서는 예술가로서 살아있기 위한 생명수의 역할을 한다. 그것을 놓아버린 예술가는 머리카락을 빼앗긴 삼손처럼 특별한 능력을 잃어버린다.

 

 

<뭉크, 저승에서의 자화상, 1895>

 

 

뭉크는 부동산, 그림, 판화, 소묘 등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노르웨이의 오슬로시에 기증했다. 이를 바탕으로 오슬로시는 1963년에 뭉크 미술관을 개관했다. 우리는 그 덕분에 그의 작품을 더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다.

 

 

 

<뭉크, 골고타, 1900>

 

 

모네리자의 소리없는 절규, 뭉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네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보기>

 

www.youtube.com/watch?v=a_ZeGsk4xfs

<뭉크의 작품세계>

 

www.youtube.com/watch?v=kI-kasuXPCs

<뭉크 '절규'의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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