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욕망을 그리는 남자

2020. 9. 16. 17:44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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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리자는 기괴함과 모던함의 대명사인 화가 달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달리의 그림을 좋아하는가?

 

 

 

<살바도르 달리>

 

 

 

<달리, 구운 베이컨과 부드러운 자화상, 1941>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도 달리의 그림을 보면 한 번쯤 본 적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흘러내리는 시계는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달리의 그림은 다양한 분야에 많이 알려져 있고, 많이 활용되었고, 패러디도 많다.

 

 

 

<달리, 기억의 지속, 1931>

 

 

 

<달리, 녹아내리는 시계, 1954>

 

 

 

달리의 그림은 기괴하고 신비롭다. 그의 그림에는 광기가 가득하다. 예술가에게 있어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탁월한 장점이다. 그러한 면에서 달리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을 천재라고 말하곤 했다.

 

 

 

<달리, 봄의 첫날, 1929>

 

 

 

<달리, 현대적인 광상곡, 1957>

 

 

 

 

달리는 독특한 표정과 특이한 패션감각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늘 화려한 블라우스를 즐겨 입었고 꼬부라진 콧수염을 고집했다. 그리고 황금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를 소품처럼 가지고 다녔다. 달리는 존재 그 자체로 하나의 오브제였다.

 

 

 

<달리, 피는 꿀보다 달콤하다, 1927>

 

 

 

<달리, 빛에 비친 쾌락, 1924>

 

 

 

달리는 메뚜기를 싫어했다. 그에게 메뚜기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심지어는 메뚜기 때문에 기절한 적도 있고,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에는 종종 메뚜기가 등장한다. 그의 기괴함은 그의 작품을 통해 투사되었다. 심리학자들은 메뚜기에 대한 달리의 환상이 아버지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달리는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싫어했고 그러한 대상인 아버지를 메뚜기로 전환시켰다는 것이다.

 

 

 

<달리, 윌리엄 텔의 수수께끼, 1933>

 

 

 

<달리, 신인간의 탄생을 지켜보는 지정학적인 아이, 1943>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달리는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 심한 어리광쟁이였으며 여덟 살 때까지 침대에서 대소변을 했다. 학교에 입학해서도 규율을 잘 지키지 않았고, 말썽을 부리곤 했으며, 자주 아파서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 심리학자들은 사회체계에 진입하면서 겪는 불편함을 잦은 병치례로 대신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달리, 소녀라고 믿었던 6세의 달리, 바다의 그림자에서 잠자는 강아지를 보기 위해 물의 표면을 듦, 1950>

 

 

 

<달리, 우울한 놀이, 1929>

 

 

 

그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고, 평범한 성인도 아니었다. 병적 요인을 고려할 정도로 특이했던 그의 성격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의 작품은 금지된 욕망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도발적이다 못해 기괴하다. 이 때문에 달리의 작품을 오이디푸스 콤플레스적인 관점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프로이트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는 확실하게 프로이트의 이론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관념은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달리의 기행은 어린 시절의 성적 문제보다는 권위에 대한 저항의 문제로 보인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응석받이로 자란 아이들이 아버지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저항의 문제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해석한다. 그의 견해에는 성적인 부분이 언급되지 않는다.

 

 

 

<달리, 프로이트의 초상, 1938>

 

 

 

<달리, 피 흘리는 로즈, 1930>

 

 

 

달리는 기행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달리는 조커처럼 한 번 웃기 시작하면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거의 익지 않은 생고기를 먹었고, 황소의 피를 즐겨 마셨다. 그는 신선한 피가 에너지를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을 먹는 풍습인 카니발리즘에 심취하여 직접 그리기도 했다.

 

 

 

 

<달리, 첫 거위 살점, 1928>

 

 

 

<달리, 가을의 카니발리즘, 1936>

 

 

 

달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평생 동안 아버지를 이런저런 이유로 괴롭혔다. 그는 퇴학을 두 번이나 당했고, 미술학교 입학시험에서는 자신이 그린 데생을 일부러 없애버리기도 했다. 그의 기행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한치도 내다볼 수 없는 그의 자유분방함 때문에 초현실주의 화가 그룹은 그를 제명했다. 그는 유부녀인 갈라와 결혼을 하면서 아버지와의 인연도 끊었다.

 

 

 

 

<달리, 악마같은 악마, 1951>

 

 

 

그는 어릴 때 죽은 형을 신성화시키기도 했다. '살바도르 달리'라는 이름은 죽은 형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그는 죽은 형을 미화시킴으로써 아버지의 자리에 형을 올려놓았다. 훗날 여동생의 회고에 따르면 달리의 형은 한 살도 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달리가 그를 기억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형에 대한 그의 기억은 환상과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형에 대한 기억에 집착한 이유는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달리, 불타는 기린, 1937>

 

 

 

그의 기괴함은 영화의 영역까지도 확장되었다. 루이스 부뉴엘과 달리가 공동제작한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는 특별한 줄거리 없이 여러 가지 이미지를 뒤섞어 나열한 영화이다. 영화 속에는 칼로 여성의 안구를 베어버리는 끔찍한 장면도 있다. 영화는 금기와 역설의 혼란을 보여준다. 히치콕 감독은 스릴러 영화 ‘스펠바운드’를 찍을 때 미술감독으로 달리를 생각했고, 달리는 옥상, 피라미드, 무도회장, 도박장의 네 장면을 제작했다. 확대된 가위가 커튼에 그려진 눈을 자르는 기괴한 장면은 달리의 작품이다. 그는 작품 속에서 인간의 눈에 집착했는데 눈은 인간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수단으로써의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중에서>

 

 

 

<영화 '스펠바운드' 중에서>

 

 

 

<영화 '스펠바운드' 중에서>

 

 

 

그는 여성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불안해 하고 공포감을 느꼈다. 그의 이러한 마음상태는 그의 작품에 투사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금기와 욕망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그는 절친한 친구의 아내인 갈라를 사랑하게 되면서 이러한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종종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모순되게도 그러한 시기에 더 많은 작품을 그릴 수 있었다.

 

 

 

<달리, 폴 엘뤼아르의 초상화, 1929>

 

 

 

<달리와 갈라>

 

 

 

갈라는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였다. 그녀의 본명은 '엘레나 디미트리 예브나 디아코노바라'인데 '축제'를 의미하는 갈라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녀는 당시 예술가들의 뮤즈로 그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그녀는 화려하고 이기적인 여성이었다. 그녀의 삶은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화가 에른스트의 연인이었기도 했던 그녀는 에른스트가 아내와 자식을 버린 뒤 에른스트, 엘뤼아르와 함께 동거생활을 한다. 세 사람의 결혼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갈라는 우상이었다. 갈라는 후에 달리의 아내가 된다. 그녀는 말년에 성형중독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난다.

 

 

 

 

<달리, 원뿔 모양의 괴물이 들이닥치기 직전 갈라와 밀레의 만종, 1933>

 

 

 

<달리, 공으로 그린 갈라테이아, 1952>

 

 

 

그는 갈라를 만나 행복하기만 했을까?

 

갈라는 정신착란증에 시달리는 달리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성이다. 그는 갈라가 자신의 광기를 치료했다고 믿었다. 그는 갈라와 만날 때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몸에 지저분한 것을 바르고 썩은 양파를 겨드랑이에 끼고 청혼했다. 간절함도 기괴스럽게 표현하는 그의 초현실적 감각과 유머는 갈라를 만족시켰다. 그의 작품 속에서 갈라는 요부로도, 신성한 여인으로도, 음식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기괴한 대상으로도 표현된다.

 

 

 

 

<달리, 양고기를 어깨에 얹고 있는 갈라의 초상화, 1933>

 

 

 

<달리, 레다 아토미카, 1949>

 

 

 

<달리, 그리스도의 승천, 1958>

 

 

 

갈라에 대한 달리의 집착은 수많은 예술작품을 탄생시켰다. 그녀는 영감의 원천이었고, 근원의 샘이었다. 달리는 엄마의 뱃속에 있던 기간을 천국의 기억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갈라는 그러한 아득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환상의 뮤즈였다.

 

 

 

 

<달리, 리가트 항구의 마돈나, 1950>

 

 

 

달리와 갈라의 사랑은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라는 결말을 맺지 못했다. 갈라는 달리를 멀리하기도 했고, 갈라의 불륜에 분노한 달리는 폭행을 하기도 했다. 폭행당한 갈라가 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진정제와 바리움, 암페타민을 투여했고 잠시 혼수상태에 빠졌던 달리의 신경계가 손상되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올바른 시작이 아니었던 사랑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달리, 욕망의 수수께끼, 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1929>

 

 

 

갈라는 1982년에 사망했다. 갈라의 죽음 이후에 달리의 삶은 메마른 사막이 되었다. 뮤즈가 사라진 달리에게는 창조의 샘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말년에는 수전증이 찾아와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도 없었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자살시도는 그의 신체를 망가뜨렸다. 음식물을 삼킬 수 없어 죽는 날까지 튜브를 통해 음식을 섭취했다.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달리는 1989년 심장마비로 갈라에게 돌아갔다.

 

 

 

<달리, 시간의 눈, 1949>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츄파춥스'를 통해 달리를 만날 수 있다. 1968년경 츄파춥스의 창업자인 엔릭 베르나르가 달리와 식사를 하던 중 아이디어에 대한 제안을 했고, 즉석에서 냅킨에 그려준 그림이 츄파춥스의 디자인이 되었다. 달리의 상상력은 츄파춥스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츄파춥스>

 

 

 

모네리자의 금지된 욕망을 그리는 남자, 달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네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보기 >


https://youtu.be/F1eLeIocAcU

<달리의 꿈, 360°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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