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적인 남자

2020. 10. 29. 15:33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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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리자는 파괴적인 남자, 피카소의 삶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이중적인 삶을 살다.

 

 

 

 

<피카소>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피카소의 이름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위대한 예술가이다. 그에게는 유독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그는 20세가 되기 이전에 고전주의를 마스터했고, 15세에는 이미 대가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최초로 면과 선을 해체하여 입체적으로 재조합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피카소의 그림은 사실적이지 않았고 그가 추구한 예술의 본질은 자연에서 벗어나 인간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예술은 무엇이든 용서가 된다'라는 말을 직접 몸소 실천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공산주의자였으며 여성편력이 매우 심했고 변덕스러웠다. 그리고 살아생전 큰 부자가 되었다.

 

자신만의 방식을 추구하다.

 

 

 

 

<피카소, 기타리스트, 1910>

 

 

 

피카소는 사물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구현하기 위해 혁명적인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는 안달루시아 출신으로 한때 바르셀로나에서 미술학교 라 론하에 다니기도 했으나 스스로 터득하고,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는 방법을 좋아했다. 피카소는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회화는 추가의 결합이다. 나에게 회화는 파괴의 결합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파괴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봤을 때 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 곳에서 빼낸 빨간색이 다른 곳에서 나타날 뿐이다."

피카소

 

 

 

 

<피카소, 해변에서 책 읽는 소녀, 1937>

 

 

 

피카소는 산업화라는 시대적 분위기에 맞는 생산적인 화가였다. 그는 빠른 속도로 작품을 완성했다. 아침마다 그림을 그리고 오후에는 다른 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입체파로 유명하지만 그외의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초기의 그림에는 입체파적인 느낌이 없다. 그는 늘 실험적이었고 종이, 캔버스, 돌, 세라믹, 금속 등 모든 표현수단을 동원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3만 점이 넘고 작품목록총서도 33권이나 된다.

 

우울의 시대를 표현하다.

 

 

 

 

<피카소, 불행, 1903>

 

 

 

피카소 작품의 첫 번째 시기는 작품활동을 시작한 초기부터 1904년 무렵이다. 그리고 '청색시대'가 이어진다.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은 파란 색조의 상징적인 그림이다. 초기에는 매우 가난하게 살았는데 이때 그린 그림들은 모두 우울한 블루톤이다. 그는 작품 속에 슬픔, 우울, 고난 등을 담았다. 그래서 '청색시대'이다.

 

 

“친구가 여자문제로 자살했다. 슬프다. 하늘이 파랗다. 그림을 그렸다. 안 팔린다. 하늘이 무너질 듯 시꺼멓다. 둘을 합치니 진한 파란색이 나왔다.”

피카소

 

 

 

 

<피카소, 여인, 1902>
<피카소, 파란 누드, 1902>
<피카소, 푸른 머리의 여인, 1904>

 

 

 

“모든 어린이는 화가이다. 문제는 커서 어떻게 화가로 남아있는가에 있다.”

피카소

 

 

사랑으로 구원받다.

 

청색시대 이후 '장미빛 시대'로 이어진다. 피카소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며 장미빛 시대로 들어선다. 그는 사랑으로 구원받았다고 느낀다. 이 시기에는 주로 주변의 사물과 공간에서 이탈된 그림을 그렸다. 또한 기존의 재현예술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피카소에게 경제적 여유를 가져다준다.

 

 

 

 

<피카소, 페르낭드, 1905>
<피카소, 꽃바구니를 든 소녀, 1905>

 

 

 

창조적 파괴가 명성을 가져오다.

 

1907년에는 본격적으로 자연과 재현에서 벗어나 선형분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도는 피카소의 최고 발명품인 입체주의로 이어진다. 그는 사물을 해체하고 덩어리와 선으로 재구성했다. 피카소 작품의 입체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 유명한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렸다. 경제학자 슘페터가 주장한 '창조적 파괴'가 예술작품에 적용된 것이다. 재현의 죽음으로써 새로운 방식의 재창조가 시작되었고 이는 피카소에게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준다.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입체주의 이후 전쟁이 끝난 후에는 주로 의상과 무대장치를 디자인하고 무대배경을 그린다. 그리고 고전미술의 이미지를 이용한 고전주의가 시작된다.

 

 

 

 

<피카소, 의자에 앉아 있는 올가, 1917>
<피카소, 올가의 초상, 1922-1923>

 

 

 

“만일 화가가 말을 그린다면 당신은 말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야생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피카소

 

 

고전주의 미술작품을 그리다가 잠시 초현실주의 시기로 들어선다. 그는 초현실주의 예술가가 아니지만 1925년부터 1930년에 이르는 시기에 몇몇 작품들을 내놓았다.

 

 

 

 

<피카소, 키스, 1925>
<피카소, 댄스, 1925>

 

 

 

반전그림을 그리다.

 

스페인 내란 중에는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기도 했다. 이 시기는 그의 그림사조 중 일곱 번째 시기이다. 그는 공화당 정부의 요청으로 '게르니카'를 그렸고 이는 일생의 역작이 되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한국전쟁과 관련된 작품도 그렸는데 이는 한때 한국에서 금지예술품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피카소, 게르니카, 1937>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고야, 마네의 작품 참고)>

 

 

 

절망의 시대가 다가오다.

 

피카소의 말년은 그의 작품의 여덟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그는 늙어가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젊은 아들을 질투하기도 했다. 그의 불안감은 악화되었고 절망을 느끼게 된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노타우로스, 벨라스케스와 고야와 같은 대가들의 변형된 모습, 투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등을 그렸다. 모든 주제는 서로 겹쳐서 표현되어 분간하기 어렵다.

 

 

 

 

<피카소, 동굴 앞의 미노타우로스와 죽은 암말, 1963>
<피카소, 모델 위에 그리는 화가, 1963>
<피카소, 엄마와 아기, 1965>
<피카소, 그의 작품과 관객, 1968>
<피카소, 궁녀들, 1968(원작 : 벨라스케스)>

 

 

 

“부수고 싶은 욕구는 창의적인 욕구이기도 하다.”

피카소

 

 

천재적 능력으로 사람을 이용하다.

 

피카소는 천재적 능력을 가진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도 미술을 했는데 아들의 재능을 보고 그림을 포기했다고 한다. 피카소는 일찍부터 성공을 맛보았고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느끼고 살았다. 그는 명쾌하고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평생 많은 여성들이 있었는데 자신을 사랑하는 여성들에게 고통을 주기도 했고 그들을 모델로 하여 뒤틀리고 왜곡된 여성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모순되게도 여성들이 느낀 고통의 크기만큼 피카소의 작품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피카소가 동성애자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러한 관심을 싫어하지 않았다.

 

 

 

 

<피카소, 강간, 1940>

 

 

 

“난 돈이 많은 거지처럼 살고 싶다.”

피카소

 

 

그는 신에게 부여받는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였지만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능력이 부족한 도덕적 무감각자였으며 나르시시스트이기도 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티스에 대해서는 험담을 늘어놓았고 그의 작품활동에 훼방을 놓기도 했다.

 

 

 

 

<피카소, 꿈, 1932>
<피카소, 꽃과 여인, 1932>

 

 

 

사디스트로서의 삶을 살다.

 

그는 쾌락을 위해 여성을 이용했고 무시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신이라 생각했고 자신의 부당한 행위는 신다운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은 때로 이해하기 힘들어 보이기도 한다. 심리학자 융은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그를 정신분열증 환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그린 왜곡된 여성의 모습은 그가 여자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면서 얻는 괴상한 기쁨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종종 여성을 학대했다.

 

 

 

 

<피카소, 우는 여인, 1937>
<피카소, 마리 테레즈의 초상, 1937>
<피카소, 도라 마르, 1941>

 

 

 

그는 사드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위대한 예술가가 악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악한 면과 창조적인 면이 공존했던 천재는 많다. 피카소는 사악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사악함과 이기주의는 놀라운 작품을 창조하는 근원이 되었다. 이기주의는 자연에 대한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는 힘이 되었고 그 힘은 새로운 영역의 예술을 창조했다. 그의 작품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모네리자의 파괴적인 남자, 피카소의 삶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네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

 

폴 존슨, 창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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