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희망을 찾다

2020. 6. 15. 16:001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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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리자는 죽음의 절망 속에서 인간성이라는 희망을 찾아낸 빅터 프랭클을 소개하고자 한다.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직접 경험하고, 겪어내고, 생존한 한 위대한 인간의 이야기이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 책을 쓴 빅터 프랭클은 빈 3학파에 속하는 유명한 심리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이지만 책의 내용은 전문적이거나 어렵지 않다. 그냥 담담하게 써내려 간 하루하루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쉽게 읽히고, 깊은 울림을 준다. 죽음 앞의 공포 속에서도 삶의 품위를 잃지 않고자 했던 한 인간의 삶은 존경스럽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정신과 의사인 이시형 박사는 가난한 유학생 시절, 추위와 굶주림에 더이상 걸을 수조차 없는 상황 속에서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단숨에 이 책을 읽어버렸다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그처럼 이 책은 우리 안의 무엇인가를 건드리고, 빨아들인다.

 

프랭클은 나치에게 직장, 집, 이름, 자유까지 차례로 빼앗기다가 수용소로 끌려간다. 그는 제대로 서있을 수조차 없는 빼곡한 열차에 실려 수용소에 도착한다. 옷을 포함한 모든 소지품들을 빼앗긴 그는 순진하게도 수용소 관리자에게 꼬깃꼬깃하게 접혀진 종이, 그의 연구자료만은 남겨달라고 부탁한다. 아니 사정한다. 관리자는 비열하게 웃으며 눈앞에서 찢어버린다. 그러나 나치는 그에게서 모든 것들을 빼앗아 갔지만 그의 존엄성만은 빼앗아 갈 수 없었다.


<오노레 도미에, 삼등열차>

 

수용소라는 곳은 모든 인간군상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죽어가는 동료의 신발부터 훔쳐가는 사람들과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얼마 안 되는 음식을 양보하는 사람까지...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에 지쳐가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간성을 자연스럽게 잃어간다.

 

 

"부조리란 인생에서 삶의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이며 , 이것은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그 자체에 내재 한다"
알베르 카뮈



<데이비드 올레레, 산자들을 위한 사자의 음식>

 

프랭클은 다른 선택을 한다.

가족들의 죽음을 알게 된 후에도 그는 삶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았다. 그는 인간성을 잃지 않고 끝까지 생존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외부인처럼 바라보면서 마음을 객관화한다. 그리고 생을 놓아버리려는 동료들을 독려하며 정신과의사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 찬 수용소의 생활 속에서도 한 자락의 아름다움은 존재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죽음과 같은 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저녁나절의 석양은 아름다웠다.


"우리가 삶에 걸고 있는 기대는 진실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삶이 우리들에게 걸고 있는 기대인 것이다."
프랭클


<모네, 석양에 물든 바다>

 

프랭클은 그곳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지나고, 죽을 사람과 살아갈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나치의 명령에 기계적으로 따르던 사람들 중 몇몇은 죽을만큼 맞으면서도 바닥에 누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기 시작한다. 모든 것들을 놓아버린 것이다. 삶의 의지조차 말이다. 그런 사람은 며칠 못 가 죽어버렸다.

프랭클은 동료들에게 '삶의 의미'라는 것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그들이 받은 고통은 보람 찬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 낸 방법은 순수한 내적인 성취라고 말한다. 나치는 모든 것들을 빼앗았지만 마음의 자유만큼은 빼앗아 갈 수 없었다. 우리 안의 심령적 자유는 삶을 의미있게 만든다. 의미있는 삶은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다. 그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그는 매순간 현실의 고통이 보람있는 것이고, 고통을 참고 견디는 자신의 선택은 내적인 성취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미있게 만들고자 인간으로 살아남으려고 노력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와 현대의 좀비시리즈도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바닥까지 내려가는 사람들과 인간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좀비물도 마찬가지로 잃어가는 자와 지키는 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 '새벽의 저주' 중에서>

 

그는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후에 그곳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의미치료)'라는 것을 창안한다. 로고테라피는 의미를 찾아줌으로써 삶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는 삶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의미를 찾아줌으로써 살고자 하는 의욕을 갖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고통스러워 죽음을 호소하는 내담자들에게 다소 자극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왜 자살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살고자 하는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조차도 선뜻 답을 하기 쉽지 않다. 죽음이라는 거대하고 절망적인 산 앞에서도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는 일상의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을 떠올리면서도 당장 눈앞에 주어진 과제를 생각하고, 어제 했던 약속을 떠올리고, 엄마가 해주신 따뜻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우습게도 인간은 그런 존재이다.

 

<클림트, 여자의 세시기>

 

프랭클은 이것을 모자이크, 삶의 작은 조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작은 모자이크 조각들을 연결하면 한 인간의 역사가 된다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라고 말이다.

그는 우리에게 모자이크 조각을 엮어주고자, 삶의 의미를 찾아주고자 죽는 날까지 헌신했다.

 


“살아갈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

니체

 

 

모네리자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희망을 찾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오늘도 1깡한 모네리자는 행복합니다.

 

모네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함께 보기>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https://www.youtube.com/watch?v=vMh9J6MvLSA